나뭇가지를 그리면 새들이 날아와 앉고, 생선을 그리면 고양이가 종이째 가져가며, 음식을 그리면 냄새까지 느껴질것만 같은 차원의 경계를 초월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녀는 "초고교급 화가"로 불린다. 집안 대대로 미술가 핏줄인 니지우에 가문에서도 유래없을 천재로 평가받아 고교생 나이에 이미 그 실력은 세계급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대단한 재능과는 별개로 본인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잘 못하고, 겁도 많고 툭하면 우는 초 심약한 성격. 어릴 때부터 그래왔기에 최대한 자기를 진정시키고자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이 울보 성격을 커버해줄만큼 효과가 있지는 못한듯.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물게 모든 기사를 수기로 해내는 "초고교급 신문기자". 그가 기사를 쓰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펜과 메모장, 그리고 오른손뿐이다. 그가 이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이 펜과 종이만 가지고 시작한 기자일의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펜을 드는 자신의 오른손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기자답게 수다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음흉한 구석도 있는 전형적인 남고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최고급 바에서 에이스로 군림하던 "초고교급 호스티스"인 그녀는 그 사교적인 재능에 눈독들인 희망봉 학원의 입학제의와 동시에 나이를 속이고 일하던 것이 들통났고 울며 겨자먹기로 입학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눈치가 빠르고 이런저런 지식에 박식한 그녀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일을 불건전한 유흥업으로 취급받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
마약, 불법개조총기, 비밀문서 등 음지에서 행해지는 모든 흉흉한 거래를 중개하는 그는 "초고교급 브로커"라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거래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직접 청부도 도맡아 하는 악질 범죄자인 그가 가장 자신있는 특기는 "매수"로, 누구도 그의 정체를 제대로 모르며, 그를 감옥에 집어넣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슨 짓을 해도 양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갑작스럽게 희망봉 학원에 입학한다는 사실은 음지의 사람이나 양지의 사람이나 경악을 금치않을 수 없었다.
최고최악의 브로커인 하시모토 쇼바이가 고교생이었다는 것 자체부터 반전을 과시한 그는, 무언가 노리는 것이 있는 걸까?
이 글은 어디까지나 정사가 아니며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냥 재미로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본편을 즐기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접어두었습니다.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니 실수로나마 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눈은 녹아서 물이 되어 아무렇게나 고여있을 무렵이다.
그리고 안개가 자욱했다.
"무슨 일로 불렀는 지 알겠니?"
오래된 찻집으로 남자가 불렀다.
익숙한 얼굴.
차츰 검버섯이피고 여러 겹의 그림자가 깊게 파이는 때.
눈 옆의 커다란 반점은 확실한 인상을 주었다.
조악한 엠파이어 양식의 목조의자에 사뿐히 걸터앉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코코아 한잔을 밀었다.
이미 녹아버려서 사라져버린 눈송이같이 새하얀 마시멜로가 코코아 위를 유영했다.
"몇가지로..... 추릴 수 있지만, 다 내키지 않는 것들 뿐이네요."
남자의 손을 뿌리치 듯 잔을 받아 당겼다.
그는 쓴 웃음을 지었고 그것은 오랫동안 머물러있었다.
남자는 육안으로도 보일만큼 기름진 커피를 마셨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오늘로서 너가 여기에 온지 2년이 되는 날이란다."
그는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눈을 지긋이 감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연상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끝마치자마자 이어진 말덕택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떠난 날이기도 하죠."
남자는 흠칫 놀란 듯 눈을 떴다.
그리곤 입양쪽을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것도 기억하고 있구나.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런 날이었지.
미안하다. 좋지 않은 걸 떠올리게 만들어버렸구나."
관심없다는 듯이 티스푼으로 마시멜로를 괴롭혔다.
뜨거운 코코아의 수면에서 둥실거렸다.
"지겨워요......"
남자는 코로 한숨을 내뱉었다.
"모든 게다. 빌어먹을 부모이야기를 이렇게 하는 것도. 남에게 영혼없는 동정을 받는 것도. 그리고 쓸데없는 말로
이상한 소식을 얼버무리려 하는 것도요."
이제는 헤묵은 이야기다.
부모는 떠났다.
자식은 내팽겨친 채, 그들만의 세상으로 향했다.
그 자식은 세상을 따라 이리저리 떠돌다 하나의 생존양식을 습득했다.
그것은 조금이나마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녀의 선택이었다.
"너는 항상 다 안다는 듯이....."
"하지만 커피는 못마시죠."
물방울들이 매달린 창가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 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관심을 유도할 수 없다는 것도.
익숙하게 겸연쩍어 한 뒤, 졌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당시 네 눈빛은 어린아이가 가질 게 아니였지. 왜 그런 아이가 이곳 미국에 까지 흘러들어오게 된건지는 잘모르겠지만. 고아원에서 너를 보는 순간, 나는 너를 구해야할 의무가 생긴 것 같았어. 마누라, 자식 부족할 게 없는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 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단다.내가 너를 후원하기로 결정한 건 잘했다기보다도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단다, 레이"
메카루는 묵묵히 창밖을 관찰했다.
남자는 듣고 있던 그렇지 않던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이번에 내놓은 논문도 훌륭했다. 빼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간 학계에서 헛점이라 인정했던 지점을 확실하게 보완해냈더구나. 평범한 교수라도 연구실에 박혀서 몇년동안 논문에만 매달린다하더라도 이룩할 수 없는 일이야. 중학생정도의 아이와는 정말 연관성이 없는 일이라 여겨졌지. 그렇기에 보스턴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거겠지만 말이야..어쩌면 그건 시작일 지 모르겠구나. 네가 그 자리에 정식으로 임용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보완을 넘어서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내딛을 지는...... 앞으로의 일이니까. 그렇기에 우리 학계는 너를 환영하는 입장이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렇지만 중학생으로서는 벅차다고 생각한단다."
본능적으로 메카루는 고개를 돌렸다.
메카루는 남자가 한 이야기의 의미를 추론해낼 수 있었다.
그와의 만남만큼 오래된 일이다.
학문에 몸을 담그게 된 시점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지나쳐 온 모든 인연들은 그녀를 시기하는 데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녀에게는
기대뿐만 아니라 그녀의 실패를 기원하는 저주가 동시에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메카루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인간관계란 자신의 삶에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항의를 하러 간 사람들은 모두 차가운 빙벽을 마주하는 기분을 맛보야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돌아오는 답변은 같았기 때문이다.
"클레이튼 교수님."
"레이,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야기할 거라면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제가 예상한 경우중에 가장 최악인 것을 고르셨군요.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항상 같은 말로 일관해왔습니다. 학장과 상의해보세요. 그럼 저는 더 이상 할말이 없네요. 가볼게요."
메카루는 시덥잖은 일에 시간을 빼앗겼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일어서 찻집을 떠날 채비를 했다.
"학장님이라면 이미 이야기가 된 상태다."
클레이튼 교수는 가슴 팍에서 하얀 색 봉투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네가 살던 일본에 특이한 학교가 있더구나. 각 분야별로 너와 같이 아주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는 모양이야.
레이, 나는 네가 거기서 잠시라도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구나."
그는 두손을 깍지를 껴 배위에 살짝 올려둔 상태로 메카루를 보았다.
메카루의 표정은 이전과는 다르게 더욱 더 일그러졌다.
마치 옛날 고아원에서 보았던 그때와 같이.
"클레이튼 교수님, 정교수 임용 직전에 초를 치는 것도 모자라서 유배까지 보내겠다는 건가요? 이해할 수 없어요. 설마 당신들도 그 한심한 한량들이랑 같은 건가요? 저는 당신은 좀 더 이성적인 사람이 생각했어요. 교수님이 보내주었던 전폭적인 후원, 그리고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그리움......모두 제 착각이었네요."
클레이튼 교수는 손을 들어 메카루를 저지했다.
"나는 이 지식의 최전선의 한켠에 서서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단다. 너와 같은 유형은 없지만 너랑 비슷한 사람들은 많았어. 지식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지만 그 사람들과 너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지식이 소비되는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다는 거란다. 그들에게는 새로 발표된 논문은 아침 신문같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일어나서 커피 한잔이면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거야. 많은 이들은 그것을 부러워하지. 하지만 너무나도 빠른 속도는 과격함을 부른단다. 그들은 자신을 이 세계에 확립시키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치지. 그 뛰어난 재능으로! 그들이 가져온 성과는 언제나 학계를 뒤집어둘 정도의 위대함을 가진다. 그렇지만 그 수단은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너무나 거칠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그들은 미칠듯이 뛰어대면서 괴성을 지르지. 왜 이걸 이해하지 못하냐고! 그러면서 골방에 틀어박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버려. 그리고 끝에는......무관심이 찾아온단다.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 어떤 것을 봐도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지. 매우 고요한 정적과도 같은......"
클레이튼 교수는 메카루의 말에 반박은 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메카루에 대해 일말의 질투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것이다.
평생을 걸쳐 이룩해둔 업적을 누군가 단 몇달만에 일궈낸다면 그것에 대해 부정적이던 긍정적이던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게 인간이란 생물이었다.
그는 그래도 합리적인 인간이었다.
개인의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또한 그는 그것이 메카루와 자신의 몇안되는 공통점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딨죠?"
메카루는 물었다.
교수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모두 자살했단다."
메카루는 침묵했다.
그녀는 그 교수가 얘기한 사람들의 범주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코코아 위의 마시멜로는 이제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스스로 살아왔던 네게 이제와서 부모 행세하는 것도 익숙치 않구나......내 걱정이 너무 과한 것이었다면 미안하구나. 레이"
"...... 아직 의심의 여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예요. 하지만 뜻은 알겠어요. 이제와서 자식 취급당하는 건 정말 거북하지만."
메카루는 편두통에 시달리는 듯, 안경을 들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서는 클레이튼 교수가 내놓은 흰 봉투를 들었다.
"그래서 일본의 이 학교에 가면 되는 건가요?"
"그래 희망봉 학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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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튼 교수의 말에서 추론해볼 수 있는 결론 중 하나는 재능은 곧 주관을 낳는다는 것이다.
한 분야에 정통하다는 것은 그에대해 확신이 있다는 말이다.
이는 더 나아가 스스로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가는 척도가 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개성이 된다.
교수의 이야기에 등장한 천재들은 분명히 이 걷잡을 수 없는 주관의 희생양들일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재능은 파멸을 불러온다는 예시다.
역사 속에도 수많은 천재들이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필시 그들만의 처세술로 겸손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 특성은 왕의 권력이 강했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록 짙어진다.
지식과 정치는 밀접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권력자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스스로의 목숨에 직결되는 시대였다.
천재들은 겸손하지 않았고 똑똑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남겨진 그들의 업적에서는 권력아래 살아남은 그들의 강력한 주관이 이글거린다.
하지만 메카루는 그런 선대들의 처세술을 답습할 생각이 없었다.
메카루는 똑똑했기 때문이다.
위대해질 생각이 없었다.
실패한 천재들과는 달리 재능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녀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녀에게 겸손은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는 클레이튼교수가 보낸 표정에서 느낀 불안감은 모두 져버릴 수 없었다.
그는 아마 걱정보다도 경고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가 언급한 무관심에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었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일까.
덕분에 메카루는 교수가 얘기했던 희망봉 학원에 대해 흥미가 생겼다.
재능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다양한 샘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입학식에서부터 산산히 깨져야만 했다.
"네 재능은 뭐지?"
주황빛깔이 맴도는 긴 머릿결을 찰랑이며 메카루는 앞의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쭈뼛거리며 대답하기를 꺼리는 듯 보였다.
메카루가 팔짱을 낀채로 계속해서 쳐다보자 하는 수 없다는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겐 그런 건 없어. "
순간 메카루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희망봉학원 입학조건에는 고등학생을 뛰어넘는 정도의 자질을 가진 자라는 항목이 있었다.
"나는 추첨으로 들어왔거든......"
남자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 수 록 희매해져 알아듣기 힘들 정도가 되어갔다.
그리고 메카루는 그제서야 그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까다롭게 쓰여있던 입학 자격요건에 첨부되어있던 추첨제도.
그것이 희망봉학원재단이 만들어둔 보여주기식 제도라 여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보결? 그 어이없는 제도가 정말로 실존하는 거였나?"
"뭐,응 그렇지......"
메카루는 한숨을 쉬며 슬그머니 내려왔던 앞머리를 날려보냈고 남자는 완전히 기가 죽어버린 듯, 두손을 베베꼬고 있었다.
확실히 그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평범한 가정에서 부족함없이 살아온 것 같은 부드러운 인상은
어딜봐도 모난 구석이 없었다.
이 남자를 처음 봤을 때 메카루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었다.
주변의 색과 전혀 섞여들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원인은 그의 대답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었다.
메카루는 흥미가 식었다.
"재미없네.이 녀석들도 저 녀석들도. 조금이라도 괜찮은 녀석이 있을 줄 알았더니. 거기 무능, 흥미없으니까 이제 그만 다른 곳으로 가줄래?"
메카루는 손사래쳤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니?"
돌아보자 그곳에는 금발벽안의 여자가 서있었다.
청바지와 셔츠차림의 캐주얼한 복장의 여자가 못마땅한 듯 메카루를 향해 인상을 썼다.
하지만 메카루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금발의 여자는 성큼성큼걸어와서는 메카루의 손을 낚아채서 악수를 하는 듯이 흔들어보였다.
"내 이름은 마키 키요카야. 잘부탁해! 네 이름은 뭐야?"
얼떨떨 마키 키요카라는 여자의 악수에 맞춰 손을 흔들어 대던 남자는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이 그에 대답했다.
"내 이름은 마에다 유우키라고 해. 들었다시피 나는 너희들처럼 잘하는 게 없어...... 미안해......"
마키 키요카는 악수하던 두 손을 들어 내저으며 전혀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네가 누구였던 상관안해. 이제부터는 나랑 같은 반에서 지내게될 친구인 걸!"
그렇게 말하자 마에다 유우키는 기가 죽어있던 얼굴에 조금은 화색이 들은 듯 했다.
" 가만있어 보자...... 다들 초고교급 뭐라고 하나씩 간판을 달았던 데."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인상을 쓰던 마키 키요카는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 방끗했다.
"이건 어때? 초고교급 꼽사리! 아, 그리고 나는 초고교급 저격수라고 해."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듯 베시시 웃던 마키는 곧 자신을 쳐다보는 두 사람의 기분이 급변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명센스에 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나 곰곰히 고민했다.
메카루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얼굴을 감쌌고 마에다는 조금 피었던 화색이 저물어 다시 축늘어져 있었다.
"어라? 뭔가 잘못됐나? 하하하......"
마키는 뻘쭘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행운은 어떤가요?"
마키 키요카가 돌아 보았을 때는 허공만 있을 뿐.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침에 빌려왔던 동생의 지폐때문에 저주받은 거라 쓰라린 속을 달래며 다시 돌아보려 할때, 아래서 부터 조그만 손바닥이 올라왔다.
"여기예요."
익숙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조금은 불만인 듯,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린 조그만 체구의 백의를 입은 소녀가 보였다.
소녀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선 다시 말했다.
"초고교급 행운이라면 좀 더 그럴듯해 보이지 않을까요?"
예상못한 소녀의 등장에 당황하던 마키 키요카는 곧 그것이 미안함으로 바뀌었고 정말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다시한번 뒷통수를 긁어야 했다.
"......그런 소꿉놀이에 날 끼울 생각들랑말아. 그런 쓸모없는 곳에 시간낭비하기 싫으니까. "
메카루는 고개를 숙인 이노리 카나타에게서 휙 몸을 돌려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점점 인파가 몰려들 분위기에 메카루는 현기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바보들을 몇명이고 더 상대해야 한다니 무엇보다 1년넘도록 같이 있어야 한다니. 마음깊이 클레이튼 교수를 욕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심한 집단을 엘리트다하여 모집한 재단의 멍청함을 저주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희망봉학원의 존재의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매년 학교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수준에 만족하는 인재가 적정인원만큼 나올리 없을 뿐더러 그 분야가 제각기 달라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끼리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비효율적인 학교의 운영방식에 대해 그저 손해를 감내하고 엘리트학교를 만들어 동문으로 정치파벌이라도 만들 속셈인가 비꼬며 재단의 유능함을 인정하고 말았던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메카루는 이 학교의 설립목적을 알 수 없었다.
"메카루 레이라고 했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메카루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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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루 레이라고 했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메카루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뛰어난 교수라고 하더군."
달빛이 연상될 만큼 깨끗한 은발, 단정하게 가다듬은 듯한 머릿결은 윤기가 흘렀다. 그 아래는 얌전한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교수질을 잘하는 건 아니야. 내게 필요한 게 교수란 직책이였을 뿐."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은발의 남자를 보자 묘한 불쾌함을 느꼈다.
"그럴 것 같군. 그런 식으로 몰아붙인다면 누구든지 기가 죽을 테지."
"강의실에 앉아있는 불특정 다수에게라면 그런 것을 신경쓸 필요없어. 전달하는 정보의 간결함과 그걸 알아듣기 쉽게 풀어 말한다면 충분하지."
메카루는 팔짱을 풀고서 대화를 위해 은발의 남자를 정면으로 쳐다 보았다.
"미안하지만 네 이름도 듣고 싶은데, 물론 네가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말이야."
가만히 메카루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자는 깜빡했다는 듯 잠시 눈을 상기시키더니 이내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선 팔에 끼고있던 성경을 한번 쓸어만지고서는 선서하듯 말했다.
"주님을 찬양할 진저, 내 이름은 우에하라 킨지라 한다. 초고교급 신부라는 별명을 얻고 이 학교에 들어왔지. "
단발의 머릿카락이 수군거리듯 찰랑거렸다.
"하지만 너라면 내 차림을 본다면 뭐하는 녀석인지 예상은 했을텐데."
"아, 사이비 목사라도 아닌가 했지. 도저히 복장에서 어느 양식인지 알아낼 수 가 없어서 말이야."
우에하라 킨지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정식 신부가 아니라서 말이야. 나같은 경우, 신학교같은 절차가 아니라 신부노릇을 한 것을 높게 쳐주는 것 같더군."
우에하라 킨지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메카루를 향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좀 더 멀리있는 정말 소중한 것들을 대하는 표정.
마치 새끼 양들을 대하는 듯한 상냥함이 어려있었다.
"그래? 나랑 비슷하네. 나는 이곳에 정식교수 임용직전에 유배당했거든."
"그건 놀랍군. 너라면 벌써부터 교수로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줄 알았는데."
"물론 사람들을 가르치고는 있지. 부교수정도 일뿐."
"정교수라는 게 그런 의미였었나."
우에하라는 뭔가 하나를 배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하나 묻겠어. 너는 저 녀석들을 어떻게 평가하지?"
"어떻게 평가한다니?"
"나는 이곳에 학생놀이를 위해 머나먼 미국에서부터 찾아온 게 아니야.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모인다고 해서 어떤가 구경하러 온거지. 이런 친목동호회에 가입할려고 한게 아니라."
그런가하는 표정으로 지긋이 눈을 감는 우에하라 킨지.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메카루는 아직 대화가 안끝났다고 생각했기에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메카루의 인내심이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우에하라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메카루 레이. 역으로 하나 묻지. 네게 소중한 게 뭐지?"
메카루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잠자코 우에하라를 쳐다보고만 있자 우에하라는 말을 계속했다.
"종교인으로써 첨언하자면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지. 그 소중한 것에 대한 기준은 각자 다르지만 그것을 관철하고 침범받지 않기 위해 노력해. 그러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지. 너가 철부지같다고 말하는 저들은 네가 모르는 방식으로 그것을 지키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누구나 존중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박애인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지? 너라면 그것의 한계를 잘 알고 있을텐데. 한뺨을 맞으면 남은 뺨을 대라니. 나라면 바로 형사고소하겠어."
"그래, 어떤 이론에나 한계는 존재하지. 그렇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해버린 다면 너무나 피폐하지 않겠나? 나도 너처럼 사람들 앞에 서는 입장이다. 우리에겐 그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가져야할 의무가 있지. 이끄는 자로 책임을 다하는 거다."
메카루는 팔짱을 꼈다.
그녀는 그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메카루 자신이 이 학교에서 얻고자 했던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은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싸구려였다.
"재능은 베풀기 위해 있는 거라니...... 이런 낭만주의자같으니."
우에하라는 싱긋 웃었다.
"나는 속세와는 단절되어 살아서 어느쪽으로든 붕떠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과 단절되어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게 인간이라는 거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조금은 제대로된 것 같군. 싸구려틱해서 어설프지만."
"신부에게 커다란 재능이 필요할거라 생각하나? 나는 너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그저 누군가를 잘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커다란 사랑을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내 일이야."
메카루는 우에하라를 뒤로 했다.
우에하라는 멀어져가는 메카루를 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주여, 저는 제가 가는 방향이 맞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강요는 반발을 낳을 뿐입니다. 그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주십시오."
메카루는 그것을 들을 수 는 없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우에하라는 소중한 것이 뭔지 질문했다.
하지만 소중한 것은 없었다.
그런 건 잃어버린 지 오래다.
지키려고 노력하겠다는 생각도 못한 채 버려졌다.
만약 그의 말대로 재능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 자신은 대체 무엇을 지킨다는 말인가.
궤변이다.
만약 지키고자만 한다면 재능은 제대로 쓰여질 수 없다.
재능을 베푸는 데에서 진화란 없다.
정체일 뿐이다.
분명히 그것을 활용할 좀 더 그럴 듯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메카루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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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의 도덕관념을 파악한다면 그 사람이 어떤 운명속에 살 고 있는 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덕관념의 정도는 법에서 부터 출발하지만 법이 지정하는 도덕적 책임은 사회가 인정하는 것보다는 얕다.
사람이 생각하고 움직이고 하는 것은 법보다는 도덕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범법은 수렁과도 같다.
법의 울타리를 넘어본 사람은 도덕적인 일탈은 그렇게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많은 형량이 추가 되어 교도소로 돌아온다.
범죄를 한번이라도 저지른 다면 돌이킬 수 없다.
킨조 츠루기는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따라 경찰이 되었다.
선량한 시민들이 범죄의 세계를 들여다 보지 않도록 선도해야 한다.
민중의 지팡이가 해야할 이상적인 목표였다.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꿈이다.
중학생시절까지는 그것이 확실한 미래라고 믿었다.
하지만 킨조 츠루기에게는 고민이 생겼다.
세간에서는 그를 영웅이라 불렀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동료 한명도 구하지 못하는 경찰이 어떻게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킨조는 딜레마에 빠졌다.
"사사키......"
스스로가 자신이 설정한 이상에 만족할 수 있는 인간인지 의문스러웠다.
아버지는 이렇게 일갈했다.
"정의에는 희생이 따른다."
처음에는 분개했지만 이제는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정의를 위해서 사사키가 희생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감정을 희생하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구하고자 했던 정의가 과연 옳은 것인지 애매해졌다.
스스로의 신념에 잿빛 안개가 끼인 듯이 답답했다.
희망봉 학원에서 초대장이 왔다.
아버지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거라 이야기했다.
킨조는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그들에게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거라 보았다.
그리고 입학 당일,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러니까...... 너 때문이라니까!"
핑크 빛 머릿칼의 여자아이가 성이나서 씩씩거리고 있다.
"그게 왜 내 탓이라는 건데!"
헤어밴드를 한 남자가 그에 대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자자, 어......히가 상? 첫날부터 이러지 말자고 ... 응?"
시대 착오적인 조종사 모자를 쓴 남자가 진정하라는 듯 타이르고 있다.
"그러니까 정리할게여! 히가씨가 골을 넣은 탓에 토모리씨가 응원하던 팀이 졌다는 거져?"
코에 삐에로 같이 빨간 공을 달은 여자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맞아, 이 마초남이 내 경기를 망가뜨렸다는 거라고!"
"하......그때 상대편 응원단이 유난히 소란스럽더라니."
히가는 짜증이 극에 달해 달관의 경지에 온 것인지 고개를 떨구었다.
"뭐어? 너가 골만 넣지 않았다면 내 30연승 무패기록은 깨지지 않았을 거라고! 작년 시즌 이후로, 순조로웠는 데 어떻게 책임질거야!"
토모리는 기가 찬다는 듯이 고성을 질렀다.
"와! 30연승이라니! 토모리 씨 대단해여!"
"이라나미, 괜히 더 자극하지 말라고. 둘다 얼굴이 새빨개졌어. 터질 것 같다고......"
항공 모자를 덮어쓴 남자는 광대같이 분장한 여자를 만류했다.
급 이라나미는 호기심이 생겼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담 코바시카와는 어떻게 생각해여?"
그러자 히가랑 토모리가 동시에 코바시카와를 돌아봤다.
"그래, 거기 동정남, 어떻게 생각해?"
"이 여자는 말이 안통하니 너가 이야기 해봐. 코바시카와."
코바시카와는 당황했다.
왜냐하면 코바시카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싸우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 둘을 만류했었던 것이다.
"아...... 저기 그게....잠깐 토모리 상? 아까는 그렇게 안불렀..."
"그랬나? 잘 모르겠는 걸? 아무튼 너도 역시 이 남자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하......"
히가는 숙였던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점점 더 코바시카와는 궁지에 몰린 강아지 마냥 움츠러 들었다.
킨조는 도저히 이 사태를 수습할 자신이 없었다.
변호사라고 했던 야마구치에게 자문해보았지만
"그게......이런 건 판례도 없고...... 아마 민사쪽인 것 같긴 한데...."
얼굴을 붉히며 애매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이건 히가가 잘못한 기야! 아무리 생각해도 골을 넣은 쪽이 잘못한 거 아니가? 보니까 토모리가 응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 같고."
얼토당토 되지 않는 주장을 하는 키 작은 친구도 있었다.
킨조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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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고. 히가, 사과하란 말이야!"
토모리는 복잡해지는 게 귀찮다는 듯 앙칼지게 말했다.
"내가 왜 사과를 해야하는 거냐고! 이상한 곳에 트집잡지 말란 말이야. 멍청아!"
"뭐? 뇌까지 축구공이 되었냐. 근육 마초남아 "
지끈거리는 머리를 인상으로 대변하면서 킨조는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했다.
처음에는 히가가 역전시킨 축구경기에 대한 앙금으로 시작한 일이 점점 서로의 감정에만 충실해져간다.
그렇다면 더 이상은 이야기해봤자 서로 감정의 골만 깊어질 뿐이었다.
"킨조, 어떻게 할거야. 저 녀석들, 서로 말이 안통해."
토모리의 급작스런 질문에 짓눌려서 꼼짝못했던 코바시카와가 틈을 타서 빠져나왔다.
당황스러워서 아직도 진정 못하겠다는 듯이 상기된 표정이었다. 킨조는 지긋이 눈을 감을 뿐이었다.
"우리 말도 안통할 것 같지만여."
이라나미 사츠키가 거들었다.
"으아... 제발 가만히 있어줘, 쟤네가 들으면 어쩔거야."
"그렇지만 저 사람들 코바시카와에게 동저....읍읍읍!"
코바시카와는 어쩌면 토모리와 히가가 들으면 더욱 더 폭발하지 모른다고 생각한 발언을 계속하려는 이
라나미의 입을 막고서 다른 구석으로 빠져 나갔다. 코바시카와의 손에 입이 막힌 이라나미는 불만스러운
듯 팔을 하늘로 뻗어 버둥거리며 끌려갔다.
"야마구치, 법정에서는 이런 경우 어떻게 해?"
킨조는 옆에서 검지를 마주대고 기가 죽은 듯이 서있는 야마구치에게 물었다.
야마구치도 입학식부터 싸우고 있는 두 남녀에게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상대방과 자신 쪽의 입장에 대해 미리 조금씩은 알고 시작하는 법정과는 달리 그들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나서서 말리면 이상하게 화해가 아니라 협박에 의해 상황이 와해되는 것 같은
양상이 되었기에 말려야 하지만 말릴 수 없는 딜레마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 법정에서는 판사님이 정숙하라고 제지해주시니까...."
법정이라는 단어에 잠시 거칠게 불끈거리는 근육과 번뜩이는 안광을 본 것 같았지만 킨조는 무시하기로
했다. 온순한 얼굴이라고는 해도 위압감을 주는 그의 체구는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몸은 긴장을 하게 만든
다. 한켠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검은 탱크탑과 세심하게 한올 한올 정성들여 넘긴 머리와 비교적 곱상한 얼
굴의 대조는 수많은 범죄자를 대한 킨조에게도 익숙치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압력에 의해 그에 대
한 평가가 사나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순수한 표정
을 짓는 그에게 어떻게 그런 야박한 낙인을 찍을 수 있겠는 가.
"그렇구나. 미안해, 괜한 걸 물은 것 같아."
킨조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야마구치에게 미안하다고 표시를 해보였다.
야마구치도 쑥스러운 듯 웃으며 화답했다.
"히가, 너가 사과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디, 상황이야 어쨌든 네가 넣은 골에 토모리양이 진 것 확실한거
아인교?"
극으로 치닿고 있는 싸움바닥에 확신에 찬 듯한 표정의 오오토리가 끼어들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킨조는 불나방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거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뭐어? 피뢰침같은 머리를 해가지고는."
히가는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아연하며 오
오토리를 내려다 보았다.
"피..피뢰침? 아침마다 왁스를 써서 세우는 건디......"
충격에 빠진 듯이 얼빵한 표정을 짓는 오오토리를 보고는 히가는 콧방귀를 꼈다.
괴랄한 헤어스타일이 즐비한 스포츠 세계이지만 그러한 머리는 잡지에서도 텔레비젼에서도 본적이 없
기 때문이다. 오오토리는 자신의 머리에 문제가 있는 지 확인하려 손을 머리위로 쭈욱 뻗어 세운 머리의 끝
부분을 툭툭 어루만졌다. 그것은 처음으로 경매에 참여할 때 아버지가 만들어준 머리였다. 아버지는 오오
토리가의 전통같은 거라고도 이야기했고 머리를 세워두면 경매를 할때 눈에 띌 수 가 있어 입찰하기 쉽
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같은 머리를 한 아버지가 오오토리는 상당히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오오토리 스스
로는 아버지가 참된 멋쟁이라고 생각했다.
"그 머리 도넛끼워두기에는 제격이겠구만. 가서 도넛이나 먹어 피뢰침."
히가는 더 이상 말하는 게 입이 아프다는 듯, 오오토리를 무시했다.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분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 다는 듯 오오토리는 울상이 되어서 고개를 떨구고 어
깨를 추욱 내린 채 물러나려 했다.그때 누군가가 그의 자칭 세련된 교복을 붙잡았다.
"특이하지만 그런 머리도 자신감있어보여서 좋아. 오오토리...맞지? 너도 뭔가 좀 아는 구나! 이 멍청남은
도저히 말이 통하지가 않아. 스스로의 잘못도 모른다니. 여기저기 튕겨다니는 축구공같이 좀 차여봐야 할
"그만들 하자. 오늘은 입학식이잖아. 앞으로 1년동안 계속 같이 생활하게 될텐데. 첫날부터 이러면 어떻게
지내?"
킨조는 조곤조곤 싸움을 말리기 시작했다.
앞서보건데 토모리와 히가는 둘다 양보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당히 높은 듯이 보였
다. 싸움이 난 원인도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이유였다. 한 사람은 자신의 응원 필
승 기록을 깨뜨렸다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유명해지는 데 한 몫한 역전승을 부정하기 때문이였
다. 희망봉 학원에 그 재능을 인정받아 입학을 허락받은 만큼 그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남다른 자부심과 노
력을 쏟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경찰로서 일하는 것을 어릴적부터 꿈꿔왔던 자신도 그들이 분개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싸우는 방식과 계기는 유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더 이상 진행되
어 봤자 히가의 경우 범죄에 까지 이를 수 있었다.
"경찰, 그렇다면 네가 판단해. 누가 잘못한 거라 생각하는 거야?"
히가는 화가 극에 달했는 지 오히려 차분해지는 듯이 보였다. 차분하게 팔짱을 끼고서 싸움을 중재하려 온 킨조에게 물었다.
"킨조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역시 조금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경찰이잖
아~"
토모리도 질려가는 지 킨조에게 물어왔다.
킨조는 경찰이다.
그것은 자기자신이 스스로에게 달아온 수식어이고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그 말은 곧 정의의 대행자라고할만 했다.조금은 옳바름을 판단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아닐까정도로 다른 이들에게는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킨조는 그렇다고는 할 수 없었다. 범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확실한 척도를 제시할 수 있었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 가늠이 안갔다. 경찰이라면 무릇 기본일정도로 취조나 싸움의 중재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킨조가 해온 일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경찰들은 킨조에게 그러한 일들은 아직 이르다면서 맡기지 않았다. 사실 그는 경찰이라고 인정받기는 했지만 아직 나이가 나이인만큼 정식은 아니기에 국가소속의 사립탐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였다. 그리고 맡은 일들은 모두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한 일이었고 그가 하는 일은 그 분명한 악의 발자취를 따라가 잡는 것 뿐이었다. 능동적이기 보다는 수동적인 것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히가와 토모리는 킨조에게 대답을 기다렸다.
"저기~ 미안한데. 우선은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보는게 어떨까? 오해한 게 있을 수 도 있잖아. 나는 누구랑
싸웠다면 그렇게 할 것 같아. 누가 잘못했다기 보다는 서로 오해를 푸는 게 먼저 아닐까?"
킨조가 어쩔 수 없이 판단을 내리려 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듣기 좋을 만큼의 음량이었지만 어째선지 기복이 있어 자신이 없는 듯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밝은 갈색머리의 남학생이 있었다.
"오해?"
히가가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히가는 이해가 안간다며 무시했고 토모리는 아래 위로 훑으며 그에 대해 평가를 하는 듯이 보였다
"이 친구의 말이 맞아. 서로 윽박만 질렀을 뿐 서로의 입장은 들어보지 않았잖아. 토모리랑 히가, 누군가의 잘잘못보다는 이 경우는 서로간의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봐. 미안하지만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는 건 어떨까. 아까처럼 감정보다는 상대방에게 입장을 천천히 이야기해봐."
킨조가 남자의 말을 이어받아 그렇게 이야기하자, 히가와 토모리는 조금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였다.
"그건 나에게 중요한 경기였어. 프리메라리가등지에서 나를 평가하러 온 심사위원들이 있던 경기이였어.
내 장래랑 직결된거나 마찬가지였다고."
히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30연승의 기록은 세간이 주목하던 거였단 말이야. 물론 그 뒤로 계속 이겼지만
내 기록이 무너져서 한동안 뉴스에서 실패한 치어요정이라고 떠들어 대던 거 알아?"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둘의 이야기는 다시 감정의 격해지면 킨조가 중재를
하면 다시 차분해지기를 반복하며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히가랑 토모리는 화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
었다.
"소리 지르면서 화내고 위협한 거 사과할게."
"나도 내 입장만 생각해서 꺅꺅거린 거는 미안하다고 생각해. "
"아,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돈 빌려주는 거 잊지마."
"......좀 화해할 때는 끝까지 잘하면 안되겠냐?"
"안돼, 이게 내 성격인걸~"
마지막 화해조차도 불안했지만 히가나 토모리의 모습에서 진심으로 화를 낸다기보다는 장난이 섞여 있
는 것 같았다. 조금은 서로 알아간 거겠지. 킨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마에다 유우키라고 해. 초고교급 행운으로 이 학교에 들어왔어."
여전히 쥐죽은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마에다 유우키는 악수를 청하는 킨조의 손에 그렇게 이야기했
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 어떻게 이야기해야할 지 감이 안왔거든...... 꼭 누구의 잘못이라 할 필요는 없다는 거로구나."
킨조는 슬며시 내미는 마에다 유우키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킨조 츠루기라고 해. 경찰이고 마에다, 1년동안 잘부탁한다."
굳건히 붙잡은 두손은 커다란 유대감이 생긴 것같은 착각이 들만큼 든든해 보였다.
하지만 입학식이 시작하자 그러한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괴상하게 생긴 흑백의 곰이 선언한 살인 게임.
학교속에 갇혀 서로 살인을 해야만 내보내 준다는 테러리스트의 협박.
범죄가 일어나기 좋은 온상이 되었다.
킨조는 자신이 그것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경찰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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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유우키는 심란했다.
입학식이 시작되자 곰은 곤란한 말을 쏟아냈다.그 내용이란 따라갈 수 없을만큼 현실에서 벗어난 이
야기였다.학교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죽여야만 나갈 수 있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처음에는 이 비상한 학교에서 벌이는 깜짝 파티정도로 현실을 도피하려고도 했지만 곰이 보여주는 증거
들은 부정하기 힘든 것이었다.분명히 행운의 힘에 기대어 이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을 텐데, 불행에 가까이 온 것 같았다.곰의 말이 끝나자 눈앞이 붉어지더니 지금의 상황에 오게 되었다.입학식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학교에 설치되어 있었다.두꺼운 강철로 된 문이 통로를 굳게 지키고 있다던가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거대한 철판에 의해 가려져 있다. 더해서 개방된 시설은 제한적이었고 쓸 수 있는 것들도 마치 감옥과 같이 감시하에 이용할 수 있었다.그 곰이라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애초에 곰이 말을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따라가기 힘들다. 마에다는 자신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다른 학생들은 다들 이 상황을 충분히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했다.
"우뿌뿌뿌!"
한숨을 쉬면서 벽에 기대어 서있던 마에다는 허공에서 튀어나온 괴상하게 생긴 것에 깜짝 놀라 펄쩍 뛰어
멀리 떨어졌다.
"꺅!"
마에다는 놀란 게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민에 잠겨서 몰랐을 뿐 주위에 누군가 있었던 것이다.
"뭐야?! 왜 이렇게 놀라는 거야!"
반은 흰색이고 반은 검은 기분나쁘게 칠해진 곰인형같은 게 화가 났다는 듯이 버럭거렸다.
"갑자기 나타나니까 당연히 놀라지! 놀래키지 좀 말아줘!"
창피한 얼굴을 보여서 부끄럽다는 듯이 방금전의 비명의 주인공은 곰인형에게 반박했다. 그러자 눈을 끔뻑이던 곰인형은 불만스러운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학교에 교장이 있다는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야? 나는 그저 마에다 군에게 고민이 있는 게 아닌지 고민상담을 해주러 온 거라고!"
급작스럽게 풍겨오는 살기 비슷한 한기에 마에다와 그녀는 침묵했다. 모노쿠마는 잠시 그 둘의 동태를 살피더니.
"아니면 타이라양, 타이라양도 고민이 있는 거야?"
"없어!"
목소리가 겹쳤다.
남녀의 목소리가 겹쳐서 저음과 고음의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이 났다.
"우씨이~ 교장으로서 걱정해준 건데! 둘다 쌀쌀맞기는 ! 삐졌어!"
뿅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노쿠마는 사라졌다.
그러자 그 뒤의 묘한 정적만이 남았다.
타이라와 마에다는 서로 어색하다는 듯이 눈빛이 마주쳤고 곧 서로 눈길을 피하며 반대방향을 보았다.
"그....... 타이라양도 고민이 있는 거야?"
마에다는 용기를 내서 타이라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녹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얼어있어봤자 득이 될게 없었다.
"아까부터 마에다가 멍하니 서있길래,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지 궁금해서...... 이래뵈도 고민상담도 할 줄 아는 메이드라고. 사용자의 심리도 헤아리는 게 훌륭한 메이드로서의 자세 아니겠어?"
부끄러운 듯 베시시 웃는 타이라의 모습에 마에다는 어색함을 풀려고 했던 자신을 잊고서 다시 어색한 듯
이 굳어버렸다. 그러다가 자신의 꼴이 웃기다는 듯이 쓴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도저히 맨 처음에 모노쿠마가 들려줬던 이야기를 따라갈 수 가 없어서...... 살인이나 학급재판이라니 다른 사람들은 다 이해하고 있는 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걸까? 타이라양은 무슨 말인지 알겠어?"
타이라는 마에다의 말에 웃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듯이 어두워 졌다. 그리곤 모노쿠마의 깜짝스런 등장에 의해 흐트러 졌던 프릴과 리본을 매만졌다.
"모노쿠마의 말은 나도 이해하기 힘들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라니. 그럴리가 없잖아. 어떻게 그럴리가 있어. 사람의 탈을 쓰고서......"
마에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 만약 모노쿠마가 아니라 이걸 계획한 사람이 따로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재미없는 사람일거야."
"어째서야?"
"왜냐면 모노쿠마를 내놓고 자기는 우리를 마치 신이라도 된냥 내려다보고 있을 거 아냐. 재미없다고도 할 수 도 있고 기분 나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 그 사람 분명 친구없을거야."
타이라는 푸훕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수 도 있겠네. 그런 사람들 자주 만나봐서 알아. 내가 일하는 저택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거든."
그렇게 우스운 일인가하며 마에다는 뻘줌해 했다.
마에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웃음에 열중하던 타이라는 조용해진 마에다를 보고선 자중하려는 듯이 웃음을 참으려 했다. 덕분에 조금의 복통을 느껴야만 했다.
" 꼭 비슷한 사람이 생각나서 그래. 그 사람을 생각하니 갑작스럽게 그립기도 하고 웃겨서 나도 모르게. 미
안해."
"타이라는 엄청 많은 사람들을 만나 봤나 보구나."
타이라는 검지를 들어 턱밑에 두고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 지금 세어보자니 정말 많구나! 그렇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히 다 기억하는 건 아니야. 물론 중요한 고객들에 대한 주의할 점같은 건 다 기억하고 있지만, 고객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거든."
마에다는 안심했다.
입학식에서도 느꼈지만 괴짜같은 아이도 있었지만 다들 결국에는 자기랑 같은 또래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희망봉 학원에서 입학 허가서가 날라왔을 는 고민했다. 과연 자신같이 평범함의 극치와 같은 사람이 가서 천재들이랑 같이 잘 지낼 수 있을까. 또 무엇보다 잘 따라갈 수 있을까. 짧은 시간이라고는 해도 경험하길, 자신이 했던 학창 생활과는 커다란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위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메뚜기 다리와 같이 꺾이고 길게 뻗은 것이 천장에 달려 아래를 감시하듯 회전하고 있었다.
마에다는 그것을 입학식에서도 경험했었다.킨조가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모노쿠마의 멱살을 잡자 저 포탑이 움직여서 킨조를 조준해 총탄을 발사했었다. 다행히 킨조의 뛰어난 반사신경에 의해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저것이 만약 자신에게 겨누어진다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기관총처럼 생긴 아래의 블록 위로 카메라는 누군가의 눈동자마냥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학창생활이라 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런 기분을 누
릴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한번 실감해야만 했다.
"마에다, 괜찮아? 아까보다 얼굴이 더 어두워졌어."
타이라는 걱정된다는 듯이 다가왔다.
멍하니 있는 동안 타이라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몰랐던 마에다는 갑자기 나타난 타이라의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마에다는 거리가 좁혀진 자신의 얼굴과 타이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당겨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마에다는 자신이 벽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거리는 멀어지기는 커녕 뒷통수를 때리는 통증을 맛보아야만 했다.벽을 때리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스르륵 벽에 등을 타고 주저 앉으면서 머리를 감싸는 마에다를 보며 타이라는 조금 전 애써 참았던 웃음을 웃도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마에다 혹시 덜렁이? 후훗."
"아니야, 덜렁인 아니라고."
마에다는 머리를 감쌌던 한 손을 들어 손을 저으며 아니라고 극렬히 부정했다. 타이라는 우아하게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풋하고 미소짓고는 다른 한 손을 마에다에게 내밀었다.
"자 잡아."
머리를 문지르던 마에다는 그 손을 발견하고서는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리고 몸에 힘을 주고 타이라의 힘에 의지해 일어나려는 순간.
"거봐! 고민이 있었잖아!"
허공에서 다시한번 모노쿠마가 나타나서 역성을 내었다. 그런 놀람에 내성이 없던 두 사람은 다시 한번 놀라며 손을 놓쳤다. 덕분에 마에다는 다시 한번 머리를 찧어야 했다.
크윽거리는 마에다의 신음소리와 다시 한번의 앙칼진 비명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모노쿠마는 잠시 타이라와 마에다의 얼굴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히면서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우뿌뿌뿌..... 그리고 불순 이성교제는 교칙에 위반한다고요."
"그런 거 아니야!"
다시 한번 목소리가 겹쳤다.
"또 나만 미워하고는! 식당에 학생 여러분이 모두 모여있다고 알려주러 왔어요. 이야기해줄 게 있는 데 따로 하기에는 부지런한 나로서도 귀찮다고~ 우뿌뿌뿌"
모노쿠마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곤 침묵이 흘렀다.
"타이라 꼭 다같이 이 곳에서 나가서 다시 학교에 가자."
"그래.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
타이라는 마에다를 끌어당겨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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